2014. 12. 11. 12:57ㆍ문화의 페이지
랴오즈
생명의 아름다움에 감사하라
도서소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어떨까?
화가 나고, 절망스럽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고……. 그러다 체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든 것을 잃고도 웃음을 잃지 않은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랴오즈. 2008년 5월 12일 원촨대지진으로 아이도, 남편도, 두 다리도, 무용가였던 자신의 삶도, 미래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잃은 것’을 슬퍼할 시간이 단 1분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도 어떻게 그토록 환하게 웃을 수 있느냐고 그녀에게 물을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에요. 수만 명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녀의 소망은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그녀를 부러워할 만큼 말이다.
이 책에 대한 서평
생명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이 말은 끝없는 암흑을 딛고 일어선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을 갖는다.
_ 《보다》 진행자 차이징(柴靜)
우리가 “왜?”라고 물을 때 종종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라 거절이나 현실에 대한 부정에서 나온다. 랴오즈도 “왜?”라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춤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마음속에 상처를 안고 있지만 미소를 지은 채 춤을 춘다. 따뜻함과 열정을 느끼게 해준 랴오즈에게 고맙다.
_ 《루위와의 데이트》 진행자 천루위(陳魯豫)
랴오즈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이유는 그녀가 겪은 고통과 배신 때문이 아니라 불행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본성을 용서한 그녀의 선택 때문이다. 그녀의 선택은 생명에 대한 찬미였다.
_ 《세상의 여자들》 진행자 양란(楊瀾)
랴오즈에께서 영혼을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_ 《이야기를 합시다》 진행자 싸베이닝(撒貝寧)
넘치는 에너지를 가지고 진정한 사랑을 전파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독한 불행마저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로 바꾸고 그 강한 사랑의 씨앗을 세상에 뿌린다. 랴오즈는 단단한 씨앗이자 희망의 빛이다.
_ 홍콩 심리치료사 겸 작가 쑤헤이(素黑)
랴오즈 혼자 수많은 영혼을 움직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인생에 넘지 못할 고통은 없다고 믿게 된다.
_ 홍콩 가수 겸 배우 정수원(鄭秀文)
랴오즈는 믿기 힘들만큼 강인한 여성이다. 그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길 바란다.
_《불평 없이 살아보기(A Complaint free world)》 저자 윌 보웬
지은이 소개
랴오즈
쓰촨성(四川) 멘주시(綿竹) 한왕진(漢旺)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무용교사였지만 2008년 원촨(汶川) 지진 때 7층짜리 아파트 아래 26시간 동안 매몰되어 딸을 잃고, 두 다리를 잃고, 결혼생활도 끝이 났다. 하지만 다리를 절단한 후 두 달 만에 끔찍한 고통을 견뎌내고 무릎으로 서는 법을 배워 이재민들을 위한 자선무용공연을 했고, 야안(雅安) 지진 때는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여진 속에서도 구호활동을 계속해 ‘가장 아름다운 자원봉사자’라는 별명을 얻는 등 불행과 절망의 끝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녀 특유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매순간 즐겁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http://weibo.com/guwuchina(@廖智)
엮은이 소개
허유영
한국외국어대학 중국어과와 동 대학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쉽게 쓰는 중국어 일기장》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다 지나간다》, 《화씨비가》, 《디테일의 힘》, 《기업의 시대》, 《저우언라이 평전》 등 60여 권이 있다.
책소개
스물 셋에 아이도, 남편도, 두 다리도 잃은 그녀.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행복을 찾아 삶을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은 어떨까?
화가 나고, 절망스럽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고……. 그러다 체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든 것을 잃고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은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랴오즈. 2008년 5월 12일 원촨 대지진으로 아이도, 남편도, 두 다리도, 무용가였던 자신의 삶도, 미래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잃은 것’을 슬퍼할 시간이 단 1분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매몰된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구조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구조 후 오랫동안 콘크리트 더미에 눌려있던 다리에 피가 돌면서 패혈증의 증세가 나타나자 그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리를 절단하기로 한다. 너무도 담담한 그녀의 모습에 의사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녀는 두 다리를 잘라내는 것보다 생명이 소중하다며 한시라도 빨리 수술해달라고 말한다. 그녀의 나이 고작 스물 셋. 그녀는 무용가였다.
삶을 뒤흔드는 고통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분노한다. 고통 속에 빠져 절망하거나 미래를 예단하고, 희망을 잃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지진으로 인해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고 소중하게 보냈다.
그녀는 다리 절단 두 달 만에 무대에 올라 무릎을 꿇고 북춤을 선보였다. 몸과 마음이 회복된 후 장애인예술단을 창단해 무용과 장애인들의 생명에 대한 열정을 하나로 모으고 중국 각지는 물론 홍콩, 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공연을 펼쳤다. 그녀도 의족을 신고 무대에 올랐다. 2013년에는 야안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자원봉사를 했다. 재해지역에서 그녀가 펜치와 철사를 손에 들고 천막을 치고 있는 사진이 SNS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가장 아름다운 자원봉사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녀는 현재 비영리단체와 교육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작은 일로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자원봉사를 한다는 그녀를 중국인들은 ‘희망의 여신’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그렇게 힘든 일을 겪고도 어떻게 그토록 환하게 웃을 수 있느냐고 그녀에게 물을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에요. 수만 명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녀의 소망은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그녀를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말이다. 그녀는 2014년 6월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혼하였고, 2014년 10월 영화 《뜨거운 약속》에 출연하며 새로운 삶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본문속으로
2008년 초 여름 내가 살던 멘주시 한왕진은 며칠 내내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밖에선 어떤 집 아이인지 길에서 크게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직 돌도 되지 않은 내 딸 충충은 할머니와 함께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놀고 있었다. 나도 점심상을 치우고 두 사람의 놀이에 참여했다.
곧 우리 모두를 삼켜버릴 거대한 변화가 소리 없이 엄습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행은 그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처음에는 집이 조금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시 후 집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의 눈이 공포에 질렸다. 내가 소리쳤다.
“지진이에요! 밖으로 나가요!”
모든 일은 한 순간에 일어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으로 달려갔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일 초 후 아파트 절반이 내 앞으로 와락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 순간 집 안에 선 채로 하늘을 보았다. 차마 형언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내가 사는 칠층짜리 아파트 반층 높이에 지붕이 얹혀 있었다. 우리 집은 삼 층이었다. 아파트 전체가 통째로 내 눈앞에서 무녀져 내렸다. 깨지 않는 악몽과 같았다. 아파트 절반이 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로 사람이 보였다. 심지어 나는 그녀가 무슨 색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기억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찰나에 사라졌다.
발밑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고 내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었다.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목구멍으로 치받쳐 올랐지만 입을 벌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시어머니가 충충을 안고 내 뒤에 서 있었다. 시어머니는 당장 주저앉을 것 같았고 나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노인과 아기, 나는 두 사람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던졌다.
“엎드려!”
시어머니는 충충을 안고 나는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우리 셋이 단단히 끌어안은 채 눈을 꽉 감았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르릉 쾅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굉음이었다. 내 옆에서 세상이 멸망하는 것 같았다. 나는 발밑이 훅 꺼지는 것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충충의 이름을 불렀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멍멍한 울림뿐이었다. 먼지와 흙더미가 머리 위로 쏟아져 눈을 가리고 입과 코, 귀를 막아버렸다. 청둥 같은 폭발음이 귓속을 가득 채우고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몸이 흔들리고 요동쳤다.
―「원촨 지진, 재앙은 한 순간에 일어났다」중에서(28~30p)
그날 이후 매일 낮 나는 엄마 몰래 친구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부탁해 2층에 있는 신생아실에 가서 아기들을 목욕시키는 걸 구경했다. 유리창 안에서 아기들이 목욕을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아기들이 귀엽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건 딸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 충충은 매일 밤 내 품에 꼭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가슴이 텅 비어버리자 허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원 친구들은 나더러 아이처럼 인형을 안고 잔다면 놀렸지만 사실 그건 내 아이가 너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낮에 친구가 또 나를 데리고 신생아실에 갔다. 나는 구경하는 걸로 부족해 몰래 산부인과 병동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려 있는 한 병실에서 엄마가 자고 있는 사이에 옆에 있는 아기를 살며시 들어 품에 안았다. 나는 아기를 한참동안이나 내려놓지 못했다. 친구는 아기 엄마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빨리 가자고 나를 재촉했지만 나는 아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아기 엄마가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아기 엄마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나도 순간 당황했다. 친구가 황급히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내가 지진으로 딸을 잃어 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그만 실례를 저질렀노라고 했다. 친구의 설명을 들은 아기 엄마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기를 좀 더 안고 계세요.”
아기 엄마는 내가 3층 병실에 있다는 걸 알고 종종 아기를 데리고 나를 찾아와 아기를 안고 있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기 엄마는 내게 자기 딸의 수양엄마가 되어달라고 했다.
-「어린이 날, 딸에게 보내는 선물」중에서(79~80p.)
다리를 절단하고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북춤’을 만났다.
제 58회 미스월드 중국 지역 선발대회를 앞두고 조직위에서 후보자들을 데리고 나를 병문안 하러 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들은 나를 처음 보고 깨끗한 얼굴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깨끗한 얼굴이 뭘까?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내가 무너진 아파트 밑에 깔려 있다 나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비참한 일을 겪은 사람이란 걸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 조직위의 한 관계자가 내 눈빛이 순수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보고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후 병실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불긋불긋 운 흔적이 있었다. 그는 내 눈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지만 내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내가 자신이 찾고 싶었던 사람임을 확신하고 나를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가 내가 말했다. “춤추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무대를 마련해줄게요. 꿈을 이룰 기회를 줄게요. 어때요?” 물론 내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튿날 그는 무용가와 안무가 세 명과 함께 나를 찾아와 안무를 짜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앉아서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무릎을 꿇고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는 게 더 인상적일 거라고 말했다.
나는 무릎을 꿇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 넘어졌지만 그때까지도 내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자세가 잘못되었던 거라고 여겼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넘어지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지만 설마 내가 무릎 꿇고 앉을 수 없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연달아 세 번을 쓰러지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멍하니 그 자리에 누워 있는데 귓가에서 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지? 너무 무서워. 무릎을 꿇을 수가 없어!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 일인 줄 처음 알았다. 휠체어에 앉으면 이리저리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내가 꿇어앉을 수 없다는 건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게 무릎 아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발이 지탱해주지 않으니 무릎만으로는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기분이 나락으로 한없이 떨어졌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뭔가 이상한 걸 느끼고 당황한 듯 내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상황을 숨기고 싶어 아무렇지 않은 듯 둘러댔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래요. 시간을 조금 주세요. 연습할게요. 한참동안 운동을 안 했더니 몸이 굳었나 봐요. 사흘만 시간을 주세요.”
병실을 나가는 그들의 꺼림칙한 표정을 보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걸 숨겨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내게 춤출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돌아간 후 아무 것도 모르는 엄마가 말했다. “자, 랴오즈, 연습하자. 사흘 뒤에는 잘하는 걸 보여줘야지.”
하지만 나는 “연습은 무슨…….” 이라며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뒤 자는 척 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내가 무릎을 꿇을 수 없다니? 왜 이러지?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었지만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뒤척였다. 엄마와 친구는 그런 나를 보며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말도 걸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춤추고 싶었지만」중에서(88~90p.)
여러 가지로 고민한 끝에 의족을 신는 편을 선택했다. 나는 육체적인 고통과 자유를 맞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 자유 속에는 내 존엄의 자유, 영혼의 자유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을 내린 뒤 나는 편히 잘 수 있었다. 속으로 내게 말했다. ‘좋아, 랴오즈. 이제 푹 자기만 하면 돼. 다른 건 다 명확해졌으니까.’
어느새 나는 병원에서 재활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이성적이었다. 이튿날부터 곧장 연습에 돌입하기로 했다. 연습을 위해서는 충분한 체력이 필요하니까 우선 잘 먹고 잘 자야한다고 생각했다. 침대에 눕자 쓸데없는 생각들이 다시 나를 괴롭혔지만 나는 속으로 말했다. ‘랴오즈, 정신차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푹 자는 거야.’
이튿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내 방 안에서 연습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부모님이 보지 않는 곳에서 연습하고 싶었다. 밖에서 연습하면 부모님은 분명히 이렇게 연습하면 안된다는 둥 그렇게 하다가는 다친다는 둥 간섭을 할 것이었다. 물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내게는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모든 소리를 배제하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다 몰아내고 오로지 연습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 볼륨을 최대로 높여 음악을 틀었다. 그러면 음악에 정신을 빼앗겨 모든 걸 잊은 채 걷는 연습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방이 워낙 좁아서 한 손으로는 전신거울을 붙잡고 한 손으로는 문고리를 잡고 의지해 걷는 연습을 했다. 연습한 지 20일쯤 되자 물고리가 헐거워지고 거울 밑받침이 부러질 듯 위태로웠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연습에만 집중했다.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오롯이 연습에만 쏟아 부었다.
-「고통 없이는 자유도 없다」중에서(117~119)
22일 우리는 바이자거우에서 자원봉사에 참여했다. 마음에 있는 집들 중 3분의 2가 무너져 폐허로 변해 있었다. 휴식 시간에 내가 반쯤 무너진 집 앞에 앉아 쉬려는데 한 대원이 위험하다며 손짓을 했다. 여진이 일어나면 집이 무너질 수 있다며 자리를 옮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너무 지쳐서 일어날 기운이 없었다.
“여진? 날 테면 나보라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말로 여진이 찾아왔다. 룽먼향에서 여진이 발생했을 때는 두 번이나 펄쩍 뛰어오를 만큼 놀랐었다. 이번에도 대원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나는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고작 두 번 흔들린 게 전부잖아. 이젠 익숙해.” 엄마가 카메라를 들고 일어나더니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찍을 테면 찍으라지. 나는 무표정하게 앉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다음 웨이보에 올렸다. 길게 설명할 기력도 없어서 짧게 한 줄 덧붙였다.
‘지진이다. 지진도 이젠 익숙해. 아, 피곤해! 지진아, 날 테면 나봐!’ 그런데 무심코 웨이보에 올린 이 사진과 글이 나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리트뉫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이 집 도와주고 나면 또 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막 세우는 일을 끝내고 잠시 쉬었다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산을 내려왔다.
그제야 겨우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그 사이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내가 올린 글의 리트윗 수가 수 천 번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걸 처음 보았을 때는 휴대폰이 고장 났다고 생각했다. 재해 지역으로 들어온 후 휴대폰에 문제가 생긴 대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휴대폰 고장이 아니었다. 내 사진 한 장이 수많은 사람들의 웨이보로 리트윗되고 나의 팔로우 수가 몇 배로 늘어나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남긴 글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나더러 장백지를 닮았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나를 ‘가장 아름다운 자원봉사자’라고 불렀다.
평소 같으면 예쁘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때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지진 지역에 관한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올릴 때는 리트윗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아무 정보도 없는 쓸데없는 글이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니. 온종일 목이 쉴 만큼 힘들게 일한 대원들은 말도 안되는 리트윗 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지진에는 관심이 없고 미녀에게만 관심이 있다며 한 마디씩 불평을 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웨이보에 다시 글을 올렸다.
‘가장 아름다운 자원봉사자라고 불리고 싶지 않아요. 내가 아니라 더 중요하고 절박한 소식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뜻하지 않게 ‘가장 아름다운 자원봉사자’가 되다」중에서 (19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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